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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p21 지갑의 거죽을 맹인의 점자 읽기처럼 손가락 끝으로 쓸면서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래 당시에는 어머니가 살아계셨지. 부적에는 어머니의 조바심과 눈물이 묻어 있었을 게다. 과학하는 자가 부적이 무엇이냐고 차마 짜증내며 버리지 못한 것은 어머니는 논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p36 나 좀 아파요. 별건 아니겠지만 오늘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을 작정이에요. 당신이 잘 인용하시던 말 저도 한번 써먹을 게요. '폭풍우의 날에도 시간은 지나간다.' 오늘따라 바람이 많이 불어요. 유리창문이 덜컹덜컹 흔들릴 정도로요. 당신의 비좁은 창으로 수없이 많은 날의바람과 비와 햇살이 지나가고 밤에는 별빛과 달빛이, 그리고 새소리며 먼 인가의 소리까지 들려오겠지요. p39 오래 전에 불경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사람이 죽으면 정이 맺혔던 부분들이 제일 먼저 썩어 없어진대요. 당신은 그 안에서 나는 이쪽 바깥에서 한 세상을 보냈어요. 힘든 적도 많았지만 우리 이 모든 나날들과 화해해요. 잘가요, 여보. 1996년 여름, 당신의 윤희 p252 그대가 걱정하실까봐. p280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머리맡에 놓인 회전식 다이얼의 검정색 전화기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마도 지정된 숫자 하나만 돌리면 외부와 연결되는 전자음 소리가 지잉, 하고 들릴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갈뫼에 전화를 걸고 한참이나 통화를 해 보았다. 응 나야, 서울에 잘 도착했어, 나는 아직 무사해, 집에 가서 동생도 만나고 어머니도 뵈었어, 널 보고싶어, 나 갈뫼로 다시 돌아갈까. p296 언젠가 책에서 읽었는데 아이들은 자라면서 부모가 지녔던 인생의 한계를 그대루 물려받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약점을 자기 것으루 사랑하게 된대. 언닌 아버지 때문에 이렇게 된 거 아닌가 몰라. (하) p18 인간은 자신의 힘에 관한 지식을 획득해서 이들 힘을 사회적 힘으로 조직하고, 그러한 사회적 힘을 더이상 정치적 힘의 형태로 자신과 분리시키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해방을 실현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p25 느이 아버지 산에 계실 제 나두 한때 그렇게 생각했다. 혼자서 느이들 키우며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가겠다구. 그런데 아버지가 살아 돌아와 곁에 같이 있으니까 그전에 어떻게 혼자 살려구 맘먹었는지 생각만 해두 앞이 캄캄하더라. 아버진 어머니 짐이 아니었어요? 짐이라니 그게 다 무슨 소리야. 가장이 있는 집은 집안 공기두 다른 법이다. p110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혁명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환멸에 치를 떨게 된다 할지라도 피부를 찌르는 듯한 전율로 나는 살아 있다고 중얼거리게 하는 사업. p126 어딘가 살아 있다 하더라도 같은 장소에서 함께 있었던 사람의 부재는 거기 남은 한사람까지 존재하지 않게 만든다. 방안의 모든 물건과 하늘의 별들까지도 꿈에 나오는 것처럼 곧 다른 장면으로 바뀌면서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p200 길은 언제나 돌아오기 위해서 있다. 누구도 끝까지 걸어간 이는 없다. 서 있던 자리에는 없어진 내가 있다. 나는 이미 그다. 나와 그가 이제 만난다. 달라진 것은 없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길. p308 당신도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들었겠지요.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어요. 살아있는 한 우리는 또 한번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혹시 바위틈 사이로 뚫린 길을 걸어들어가 갑자기 환하고 찬란한 햇빛 가운데 색색가지의 꽃이 만발한 세상을 본 건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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